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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올바른 신앙고백


새해부터 새번역 사도신경으로 사용합니다. 16:16절을 기초로 만들어진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을 우리는 성경적인 권위를 부여해서 지금까지 신앙고백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사도신경은 우리나라 신앙의 성장기에 번역되어 사용하다 보니 올바른 신앙을 고백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부분이 있다. 새로이 번역된 고백문은 이런 문제를 보완해서 우리의 신앙을 좀 더 분명하게 해주고 있다. 몇 가지 달라진 것을 살펴보면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이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달라졌다.

예수님을 외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예수님을 독생자라고 부르는데 독생자외아들은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창 22:12절에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독자라고 불렀는데, 이때 하나님이 독자라고 부른 것과 독생자는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말씀이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외아들이 아니었다. 이삭에게는 이스마엘이라는 형이 있었고 또 동생들도 여럿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삭을 독자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삭이 외아들이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어떤 아들도 대신할 수 없는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야 하는 유일한 아들이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우리가 신앙고백에서 예수님을 외아들로 고백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은 언약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 독생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아들이라고 고백하기보다는 독생자라고 고백하는 것이 낫다. 새번역에는 독생자라는 고백도 독자(외아들)로 오해될 수 있기에 유일하신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거룩한 공회거룩한 공교회로 고백하고 있다.

초기의 사도신경은 거룩한 교회(the Holy Church)를 믿사오며라고 고백을 했는데, 중세시대가 되면서 카톨릭”(Catholic)이라는 말을 더해서 거룩한 카톨릭교회(The Holy Catholic Church)라고 고백하게 된다. 우리가 공회라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몸된 교회 보다는 카톨릭 교회조직을 의미하는 면이 강하다. 결국 우리는 무의식중에 카톨릭의 조직을 신앙고백에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새번역에서 공교회라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세우신 교회에서 우리가 신앙의 터전으로 삼는 바른 고백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성도의 교제로 고백하고 있다.

카톨릭에는 연옥의 개념이 있다. 천국에 가기전에 잠시 대기하는 곳으로 면죄부 같은 것을 사용해서 지옥에 가는 사람도 천국으로 옮겨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성도가 서로 교통한다는 고백은 카톨릭 교회에서 성도들이 죽어있는 성도들과도 교제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것은 성도가 죽은 사람과 교제한다는 말도 안 되는 신앙고백이었다. 새번역에서는 교통이란 단어를 교회 성도들의 교제 한다고 고백함으로 성도들의 믿음의 성장을 믿는다는 고백으로 그 의미를 분명히 한 것이다.

 

우리가 그 동한 사용했던 신앙고백은 카톨릭의 잔재가 있고, 우리의 올바른 신앙의 고백으로 사용하기가 부적절한 것도 있다. 평생을 사용하던 고백을 다시 고치려면 불편함도 있겠지만 올바른 신앙의 고백이 필요함을 깨닫고, 새로운 신앙고백을 우리의 고백으로 분명히 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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